(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호에 이어서> 당진제철소 투자비가운데 1조 5000억원이 과투자됐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이렇다. 우선 한보철강은 A지구내 연산 100만t 철근공장에 4383억원을 투자했다고 밝혔으나 진공 탈가스장치 같은 추가시설을 갖춘 강원산업의 120만t 규모 철근공장은 1990년 2000억원이 소요됐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해 공장건설비를 아무리 높게 잡아도 당진철근공장에 2500억원 이상 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원산업은 보고 있다. 또 당진제철소 박슬래브 제1열연공장 연산 200만t에 7797억원이 투자됐다고 밝히고 있지만 포철은 똑같은 규모임에도 6500억원 밖에 들지 않았다. 포철설비는 한보철강 것보다 더 많은 부대시설이 설치됐음을 감안하면 1300억원 정도가 비싸게 먹힌 셈이다. 물론 한보철강과 포철의 열연공장 기종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곤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보철강과 기종이 같은 미국 뉴코어사의 연산 1만t급 설비는 2억 7100만 달러가 투자됐다. 이를 환산하여 한보철강과 비교해 본다면 3100억원의 차액이 발생한다. 한보철강은 또 코레스 1기에 4289억원씩 2기를 들어왔다고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호에 이어서> 수서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던 장병조(張炳朝) 씨는 88서울올림픽을 치르며 알게 됐다. 자신이 1983년부터 대한하키협회장으로 있으면서 86아시안게임에서 남녀하키가 우승하고 88서울올림픽에서 여자하키 준우승의 실적을 올리자 자연스레 체육계 인사들과 관계를 맺었다. 특히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결성된 ‘올림픽 마피아’를 통해 장병조 비서관과 깊은 인연을 맺었고 장씨는 이후 수서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러나 장씨는 결코 정씨를 원망하지 않는다. 당시 수사과정에서 그가 입을 열어 자신이 구속됐다고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장씨는 150억원을 받은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의 보호막이었을 뿐이다. 장씨는 현재 서울 강남에서 정씨의 주선으로 마련된 철강대리점을 경영하고 있다. 그의 사람 관리는 철저하면서도 독특하다. ‘문제가 생겨서 로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평소에 돈독한 교분을 쌓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로비가 아니라 부탁하는 것’이란 로비관이다. 그래서 전직 장관 등을 비롯해 전·현직 관료들의 ‘뒤’를 꾸준히 봐준다는 것이다. 그는 제대로 하면 약속한 이상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호에 이어서> 정태수 회장의 파란만장한 성공담 “항상 태양을 향해야 살아남아요. 음지로 향하면 안돼. 북극이나 남극으로 가면 살 수 없어…여러분이 이 말뜻이 무엇인지 잘 알리라고 봅니다.” 1994년 9월 한보그룹 임원워크숍. 정태수 한보 총회장이 150여명의 임직원을 앞에 두고 이런 훈시를 했다. 목단추를 풀러 헤친 편안한 와이셔츠 차림. 앞줄에는 정보근 회장이 경청하고 있었다. 이 자리는 수서사건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던 정 총회장이 당진제철소의 한보철강을 디딤돌로 삼아 화려하게 컴백하는 자리였다. 그래서인지 평소 그의 경영철학이 펼쳐졌다. 정 총회장이 목에 힘주어 말하는 ‘항상 태양을 향해야..’란 이야기는 아마도 ‘되는 쪽으로 일을 벌여 나가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그런데 참석한 임직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최고 권력에 가까이 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나를 봐라. 정국을 회오리로 몰아넣었던 수서사건에서도 재기하지 않느냐? 사업이란 그런 것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세월을 통한 정 총회장의 재기무대였던 만큼 누구나 그렇게 받아 들였다. 그는 기분이 한껏 고조돼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호에 이어서> 위조CD와 이희도지점장 사건 결말 상업은행 명동지점장 이희도씨 자살사건은 온 금융계를 냉각시켰다. 이지점장이 생전에 저지른 금융사고도 사고도 사고려니와 때마침 ‘가짜 양도성정기예금증서’까지 시중에 나돌아 한때 CD시장 마비 시중금리상승과 주가하락이라는 세 가지 악재까지 몰고 와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다. 상업은행 명동지점장 이희도 씨 자살사건으로 그동안 설마했던 은행의 사채조성사례가 사실로 확인됨에 따라 충격을 더해줬다. 자살과 가짜 CD사건간에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추측이 나돌면서 시중에는 ‘2000억원 금융사고설’이 설득력 있게 떠돌았다. 특히 인천투자금융이 상 업은행 명동지점에서 500억원어치 CD를 매입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파장은 다른 금융기관으로까지 확산될 기미를 보였다. 인천투자금융 측은 ‘당시 자금이 남아돌아 비교적 금리가 높았던 C D에 투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자금이 다시 빡빡해진 11월 중순까지 이를 처분하지 않고 자금을 묵혀둔데 대해 금융계에선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 지점장에게 100억원의 CD를 매입한 롯데건설도 마찬가지였다. 대량의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호에 이어서> CD발행제도 등 허점 많은 금융제도 서울지검 특수부 이종찬(李鍾燦) 부장검사는 같은 해 11월 26일 상업은행 전 명동지점장 이희도 씨가 양도성 예금증서(CD)를 2중유통 시킨 자금으로 사금고를 운용하다 하반기 들어 실질금리가 폭락, 큰 손실을 보고 원금마저 제대로 회수되지 않자 고민 끝에 자살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검찰은 그러나 이 씨가 최초에 자금을 유용한 이유에 대해 ‘예금유치를 위한 금리차 부담, 대출기업의 부도, 주식투자의 손실 등 여러 각도에서 조사 중이나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씨가 1986년부터 인천투자금융과 CD거래를 하면서 ‘수기(手記)보관증’을 교부하고 CD실물은 다른 곳에 유통시켰다. 사례를 보자. 1992년 11월 14일 오전 이지점장은 박과장에게 CD 100억원을 입금 없이 발행케 하였다. 이지점장은 이 CD를 소지하고 밖으로 나가 전화로 담당직원에게 가지고 나간 CD발행사실조회가 있으면 확인해 주도록 지시한다. 몇 분 뒤 대신증권 직원이 이 CD를 가지고 진위여부를 확인하고자 이 지점에 왔을 때 박과장은 증서뒷면에 자신의 도장을 찍어 확인해 주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호에 이어서> 정보사땅 매매사기 사건 결국 이 사건은 속고 속이는 전문토지사기단의 일획천금(一攫千金)을 노린 한탕주의와 법과 제도를 아랑곳 않는 무소부위(無所不爲)의 권력만능주의, 군사기밀보호를 이유로 한 밀실행정풍토 그리고 금융기관들이 다반사로 자행해온 불법금융거래 탈법적 자산운용, 관행화된 금융권정치입김작용 등이 빚어낸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여러 가지 의문점을 들어 ‘실제거래’가 아니냐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1) 이 사기극의 초기에 등장하는 핵심인물 김영호 전 합참군사자료과장이 단순한 사기꾼이었다면 1월 21일 계약금과 사례비 81억 여원을 받고서도 태연히 합참에 근무하다가 6월 11일 홍콩으로 도주하기 직전, 그 거액을 정건중 씨 부인 원유순 씨를 통해 돌려준 이유가 분명치 않고, 국방부가 김영호 씨의 범죄를 발견한 시점과 신병확보시기에 대한 발표가 여러 차례 번복되는 등 일관성 없이 오락가락했던 점. (2) 가장 의혹의 초점이 되는 것은 고도의 부동산 정보수집망과 경영능력을 가진 굴지의 금융기관인 제일생명의 사주 박남규 회장과 한국은행총재를 지낸 하영기 사장이 88년이래 사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희대의 땅 사기사건을 벌인 김영호 씨의 행각을 보자. 1988년 예비역대령으로 예편한 후 군무원 2급으로 특채돼 합참 무기체계기획과장을 거쳐 군사시설정책과장에 재직 중이던 김 씨는 1991년 1월 첫 사기극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김 씨는 당시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의 김모 씨 소유 그린벨트 8000평을 도시계획도를 위조, 오모 씨에게 팔아넘기려다 계약금과 중도금으로 1억 9500만원을 받은 상태에서 오 씨가 그린벨트지역임을 눈치 채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돈을 되돌려줘야 할 형편이 됐다. 또 이 무렵 3억 7000여만원을 빌려 관악구 봉천7동 1596의15에 연립주택 6가구를 건립했다가 2채만 분양된 채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다. 게다가 여자문제로 부인 김정희 씨(48)가 합참에 진정서까지 내기에 이르러 김 씨는 하루아침에 군사자료과장으로 좌천됐고 설상가상격으로 돈을 떼이게 된 오 씨가 사기죄로 고소하겠다고 위협까지 해왔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모종의 돌파구를 모색하던 김 씨가 토지전문브로커와 어울리며 본격적인 사기행각을 벌이게 된 것은 1991년 7월경 육사동기생으로부터 소개받아 알게 된 임환종(林煥宗·52)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위기의 해운산업, 계속된 망각 1970년대 후반 한때는 해운업이 신흥업종으로 지목되기도 했었다. 업종 자체의 수지가 좋았을 뿐 아니라 ‘자국선 적취율’을 높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따라 기업들마다 앞을 다투어 배를 사들였다. 은행들도 지급보증 수수료를 챙겨 먹는 맛에 눈이 어두워 배값의 90%나 되는 거액보증을 앞 뒤 안 가리고 남발하였다. 세계적으로 해운경기가 하강곡선을 그리면서 중고선박의 가격이 내리막일 때도 한국의 해운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사들이는 바람에 한때 배값이 오름세를 보이는 기현상을 초래하기까지 했다. 해운업자들은 자고 나면 떼돈을 벌었다. 운임수입이 늘어나서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배값이 뛰는 바람에 부동산 투기처럼 가만히 앉아서 횡재를 하는 격이었다. 은행들은 불같은 일이 일어나는 해운회사들과 거래관계를 맺기 위해서 앞을 다투었다. 이 가운데 이들이 돈을 해외로 빼돌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런 식이었다. 국내 선주가 800만 달러짜리 배를 사면서 1000만 달러에 사는 것으로 거짓 계약서를 꾸민다. 계약서를 근거로 배값의 10%인 100만 달러만 자기가 부담하고 나머지 900만 달러는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 호에 이어서> 여기서 당시에 유행하고 있는 기업들의 자금 조달방법을 따라가 보자. 시발점은 단자회사이고 종착역은 뜻밖에도 증권회사다. 우선 단자회사를 찾아가서 1%의 수수료를 내고 자기회사 어음에 단자회사의 지급보증 스탬프를 받아낸다. 이것을 들고서 보험회사나 공무원연금공단을 찾아간다. 채권을 빌리기 위해서다. 단자회사 지급보증 스탬프가 찍힌 어음을 담보로 잡히고 1.8%의 대여수수료를 지불한 다음 채권을 빌린다. 그 다음은 종착역인 증권회사로 가서 채권을 담보로 현금을 빌린다. 소위 ‘완매채’라는 것. 30일을 기한으로 해서 금리는 연 15% 정도가 보통이다. 결국 기업들이 이 ‘완매채’라는 것을 끌어 쓸 경우 물어야 하는 이자부담은 15% 이자에 지급보증 1%, 채권대여료 1.8% 등 최소한 18%선이라고 봐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든 돈(완매)이 무려 1조원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체 완매라는 것이 무엇이며 일개 증권회사가 무슨 돈이 있기에 이처럼 요긴한 자금조달 창구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완매라는 말이 일반에게 생소하듯이 생긴 역사도 불과 1년 남짓하다. 간단히 설명하면 변칙적인 환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 호에 이어서> 소위 수기통장이라는 것을 통해 김철호 씨는 이 은행의 김 대리가 조성한 자금을 사채형식으로 1066억원을 끌어 썼다. 국세청이 밝혀낸 명성의 자금조달 방식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일개 은행대리가 은행 안에 사설은행을 따로 차려놓고서 무려 1000명이 넘는 전주(錢主)들을 상대로 돈놀이를 해 명성이 필요한 자금을 공급해 왔던 것이다. 보통 사채시장이라고 하면 전화기 한 대 놓고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돈거래를 연상하기 마련인데 명성그룹의 경우에는 은행직원이 아예 은행에 앉아서 기업에 사채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버젓이 해온 것이다. 말하자면 김동겸은 은행대리의 신분으로 21개의 계열기업군을 이루고 있는 명성이라는 신흥재벌의 주거래은행장 노릇을 해 온 셈이었다. 김철호 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명성이 쓰고 있는 은행빚은 20억원에 불과하다’고 큰소리 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사채를 마음 놓고 끌어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건의 전모는 두 가지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첫째는 명성의 신비로웠던 경영의 비법이 전혀 뜻밖에도 사채자금의 조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었고, 둘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 호에 이어서> 미스터리한 명성그룹의 급성장 미스터리 기업 명성(明星). 이 그룹에 대한 정밀세무조사를 1983년 6월 15일부터 7월 20일까지 35일간 예정으로 실시하겠다고 국세청장이 밝히면서 명성에 대한 실체 해부가 시작된다. 명성그룹에 대한 세무조사는 50여 명의 정예조사요원을 투입, 정밀법인조사를 실시하였다. 그후 1개월 가량 경과한 1983년 8월 17일 국세청의 고발에 따라 대검중앙수사부는 명성그룹회장 김철호(金澈鎬) 씨(45)를 탈세, 업무상횡령 등 혐의로, 은행창구를 통해 김 씨에게 사채(私債)를 모아 준 상업은행 혜화동지점 대리 김동겸(金東謙) 씨(39)를 업무상 횡령 혐의로 각각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명성그룹은 어떠한 기업이며 붕괴시켜야만 했는가? 김철호 소유 명성계열기업은 1978년도에는 금강개발(金江開發) 등 5개 법인으로 그 자본금 총액이 8200만원이고 외형총액은 3800만원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결손이 1300만원이었다. 그런데 1982년도에는 자본규모가 59억 3000여 만원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급팽창하였다. 명성의 미스터리는 1979년 10월경으로 거슬러 올라간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 호에 이어서> 이들의 사기 수법은 앞서 말했듯이 대화산업이라는 회사를 차려놓고 자금사정이 어려운 회사들을 대상으로 빌려준 사채를 갑절이 넘는 견질 어음을 받아서 이것들을 사채시장에 할인해서 증권투자를 하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은행을 거래하게 되는 단면을 본다. 장영자는 주로 은행장만을 상대했다. 특히 장 여인의 경우 거액 예금을 미끼로 은행장들을 불러내곤 했다. 조흥은행과 관계를 맺기 전에는 장 여인은 당시 박동희(朴東熹) 주택은행장을 상대로 끈질기게 교섭을 벌였으며 정춘택(鄭春澤) 외환은행장을 불러내서도 해외투자에 대한 지원을 요구했었다. “이규광 씨 이야기도 꺼내면서 기100억원의 예금을 해주겠다기에 사실 솔깃했지요. 하마터면 나도 걸려들 뻔 했어요.” 박 행장의 말이다. “거절하기 곤란한 사람을 통해 면담을 요청해 왔기에 어쩔 수 없이 한번 만났지요. 처음 얼굴을 대하면서 하는 첫마디가 ‘외환은행장이 생각했던 것보다 꽤 젊군요’라는 것이었죠. 어쨌든 말하는 내용이 하도 엉뚱해서 정중히 거절했더니 날 더러 은행장이 뭘 그리 소심하냐는 식이었습니다.” 정 행장도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조흥은행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사채시장의 큰 손 장영자의 등장 1981년 2월경. 이철희(李哲熙, 59세) 씨와 장영자(張玲子, 38세) 씨 부부는 대화산업(大和産業)을 설립하고 사무실을 롯데호텔 18층에 차렸다. 대표는 장영자 씨. 장 여인은 처음 공영토건(共榮土建)에 접근했다. 공영은 부도를 막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사채시장에서 조달하는 처지였다. 공영토건은 대화산업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거액을 차용해 준다기에 그 차용자금에 해당하는 어음을 주는 것은 물론, 견질 담보로써 몇 장의 백지어음도 건넸다. 유리한 조건이란 차입한도 100~200억원, 금리 연 20~22%, 기간 2년 거치 3년 분할상환. 당시 사채시장에서는 A급어음이 월 2.2~2.4%, B급이 월 2.5~2.8%, C급은 2.9~3.2%로 할인(와리깡)되고 있었으니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이어서 일신제강, 라이프, 삼익주택, 태양금속, 해태제과에도 손을 뻗쳤다. 장 여인은 이 회사들로부터 어음을 받고 576억원을 사채로 꿔주고, 추가로 어음용지를 담보로 받아내 이 돈의 4~5배에 달하는 2223억원을 어음으로 만들어 사채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처음에는 사채시장에서 할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율산(栗山)의 젊은이들’ 1975년 6월 17일, 율산그룹의 모체인 율산실업은 신선호(申善浩·당시 27세) 씨와 그의 경기고교 동창들에 의해 설립됐다. 자본금은 고작 100만원. 율산의 창립초기에는 시멘트 등의 중동수출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이점은 율산보다 뒤늦게 설립됐다가 더 빨리 물거품처럼 사라졌던 제세산업(制世産業), 원기업(元企業) 등과 맥을 같이 한다. 신선호 씨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시멘트수출로 큰 재미를 볼 수 있었던 데는 물리학박사인 맏형 은호(殷浩) 씨와 친한 사우디 왕자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는 얘기도 있고, 원기업(元企業)의 원길남(元吉男) 씨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율산이 재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같은 해 34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리고 신진(新進)알미늄을 인수하고부터였다. 곧이어 금용해운(金龍海運), 동원건설(東源建設)을 잇달아 인수하고 1976년 4300만 달러, 1977년 1억6500만 달러를 수출, 1978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발돋움했다. 1977년 12월 5일에는 서울신탁은행으로부터 연리 9%의 저리수출금융 10억원을 대출 받아 자기돈 한 푼 안들이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이 사건 이후에 무엇이 달라졌는가. 남덕우 재무부장관이 국회에서 밝힌 이 사건의 문제점과 대책은 아래와 같다. 문제점으로는 압력 및 청탁이 근절되지 못한 점, 사고보고의 지연, 신용장의 진위 판별소홀, 수출금융제도의 악용, 대출업체에 대한 사후관리 소홀, 거래기관과 그에 관련된 업체의 신용조사 불철저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금록통상과 같은 부정대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단기대책과 장기대책을 마련하였다. 단기대책으로는 은행감독기능강화를 위해서 은행감독청을 설립하는 등 감독기구의 독점을 검토하고, 신종 금융사고 보험제도에 대한 신설을 검토하며, 저축목표의 개인 할당제와 기업예금에 대한 파출수납제도를 폐지하고, 금융기관직원의 처우개선을 검토하고 있으며, 대출기관에 대한 청탁, 압력을 방지하기 위해서 대출청탁 및 압력자의 보고를 철저히 하도록 하고, 각급 금융기관간에 거래기업의 상호정보교환제를 실시토록 할 방침이라고 했다. 또 장기대책으로는, 특혜금리차의 점진적 축소를 위해서 금리체계를 일원화할 방침이며, 수출금융제도를 재검토하고, 금융제도조사회를 설치하여 금융관계법규 및 제도를 연구 검토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박영복의 신용장 위조방법 신용장은 어떻게 위조했는가 ? 신용장 통지은행과 융자은행간에 신용장 대사가 허술한 점을 이용하였다. 홍콩에 있는 중국연합은행(中國聯合銀行 UCB)과 관계를 가진 외환은행이 문제다. UCB에서 외환은행에 L/C를 보내오면 외환은행이 중소기업은행 등에 이러한 L/C가 왔다고 고지해 준다. 통지를 해주고 그 마스터 L/C를 박영복에게 건넨다. 외환은행 담당자가 “직접 보내겠다”고 하면, 박영복은 “L/C를 가져야 지방지점에도 가고 상공부에도 가니, 마스터 L/C를 가져야 일이 된다”고 말했다. 박영복은 홍콩의 수입상인 교포 김경평(金慶平)과 공모하여 UCB를 통하여 특수조건부 신용장을 개설하였다. 통지은행 외환은행에서 박영복 관계인들이 받아다가 이것을 조건부를 삭제하고 아무 조건이 없는 크린 L/C처럼 가장하였다. 박영복은 외환은행을 통하여 정당히 수령한 특수조건부 신용장을 감추고 대신 위조신용장으로 시중은행에서 수출금융을 받아 냈다. 총 위조신용장은 81건에 달하였다. 그런데 특수조건내용은 “이 신용장에 의한 수출대금의 지급은 별도 개설은행이 수출품의 수량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여러 은행을 뒤흔든 박영복의 사기행각 1972년 4월 하순경 중소기업은행. 을지로지점에 영창식품(永昌食品)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는 은행장실을 제 사무실처럼 드나드는 젊은 실업가 박영복(朴永復·39)과 관계된 회사인데 당좌대출 요청을 해왔기 때문에 본점에까지 올리게 되었다. 본점 심사부에서 심사를 하다 보니 퇴계로지점에서 이미 취득한 현대통상(現代通商) 대출담보물과 동일물건이 이 당좌대출신청서에 담보로 제시된 것이 아닌가? 그 담보부동산은 대구시 신청동 대지 895평. 이를 발견한 사람은 강동기 과장이었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융자를 알선한 박영복과 관계된 모든 대출담보에 대해서 등기부를 한번 열람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 해서 법무사를 시켜 열람케 되었다. 앞의 담보가 허위였다는 것이 밝혀짐은 물론, 다른 허위담보도 드러나 6억 5100만원이나 되었다. 즉시 은행장에게 보고되었고 은행장도 비로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4억 5800만원이라는 융자가 나가 있었다. 수출금융이 2억4000만원, 일반대출이 2억 1800만원이었다. 문제의 화근은 사고발견을 했으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한편 삼호(三護)의 정재호(鄭載護), 왜 편타대출에 의존하려 했던가. 1965년 3월 2일 국회 재경위로 돌아가 보자. 역시 고흥문 위원. “…삼호재벌이 오늘날 그러한 지경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이 어디서부터 병이 되었느냐 그 원인을 조사해본 결과, 외자도입법에 의해서 장기차관을 해 가지고서 방직기라든가 기계를 수입을 해 들여와야 될 것을 무역 베이스로 차관을 해서 그 기계를 들여와 수출과 생산을 한다는 상공부의 조건부로 제일은행에 보증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니 삼척동자에게 물어보세요. 적어도 500만 달러라고 하는 거액의 자금이 3년 이내에 방직기가 들어와 수출을 해서 그것이(차관) 상환된다고 그러면 이 나라에서 사업안 할 사람이 없습니다.” 삼호재벌의 단기차관 병(病)과 정부의 과오(過誤)를 동시에 지적하고 나섰다. 단기차관 원리금상환기일이 도래하니 대지급금이 발생하고 한도초과 대출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은행은 은행법 제27조 4호 위배가 된다고 아우성이고 편타대출로 이를 메울 수밖에 없었다. 삼호는 제주도 목장, 퇴계로에 있는 동화통신건물, 제일화재 주식 등등 모든 재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흥한화섬(주)에 닥친 첫 번째 난관은 당국의 외국차관에 대한 지급보증허가가 예상 밖으로 지체된 일이었다. 인견사 생산시설 도입에 대한 허가신청을 낸 것이 1962년 12월 20일이었는데, 최종적으로 원료화학공장과 발전시설 차관에 대한 지급보증을 발급 받은 것이 무려 1년 11개월이 지난 1964년 11월의 일이었다. 당초 화신산업(주)은 차관도입에 소요되는 기간을 3개월로 잡았다. 차관도입업무에 백지상태와 같았던 당국의 실무진은 한편으로 공부를 해가며 추진할 수밖에 없어서 이처럼 시간의 차질을 가져왔던 것이다. 두 번째 난관은 내자(內資)의 잘못된 책정이었다. 처음 당국의 내자책정은 8억 4000만원인데, 기술진의 정산 결과는 6억원이 늘어난 14억원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차액은 인견사공장에 대한 양측의 견해차에서 빚어진 것이다. 당국에서는 펄프에서 인견사를 뽑아내는 비스코스 원액공장, 방사공장, 후처리공장 등 주공장의 건설만을 계상한 것이지만, 흥한화섬(주) 기술진에서는 인견사 제조용 주요약품은 국내공급이 어렵고, 이류화탄소(二硫化炭素) 같은 약품은 위험방지를 위해서도 자가제조가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상업자본가 박흥식은 누구인가? 그러면 3억 2000만원의 거액 편타를 쓰고 있었던 화신의 박흥식은 어떤 인물인가? 박흥식(朴興植)은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출생하였다. 용강이라면 임진란 때 명장 김경서(金景瑞)가 태어난 고장이며 조선 난시에 한 때 천하를 뒤흔들던 홍경래(洪景來)가 난 곳도 바로 여기다. 박흥식은 8세 때 집에서 배우던 한문공부를 그만두고 용강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나이 14세 때 진남포상공학교에 진학하려 했는데 비운이 그에게 닥쳐왔다. 형 박창식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난 것에 비관한 부친이 당시 39세의 장년으로 별세하여 집안을 돌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상업분야에 뛰어들었고,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의 첫 사업은 싸전이었다. 나이 17세. 당시 이 땅은 온통 일본 상품의 소비시장으로 전락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일본제국주의는 악명 높았던 토지조사사업을 끝내고 있었는데 이것은 식량공급기지로서 한국을 전락시키게 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 식량의 절대 부족량을 한